유족.동기 가슴에 맺힌 45년 恨 국가가 풀어야 한다

 

지난 2월 22일 위령제에서 전우의 원혼에 경의를 표하는 전우들

1974년 사고발생, 군사독재 등 어두운 시절 아무도 하소연 못해

"해군의 수치? 임무수행하다 죽은 전우 기리지 않는 것이 더 중대한 불명예"

당시 정장 운전 미숙에 따른 급변침으로 발생한 명백한 인재(人災)

159기 동기들 “보슬비 내리고 바람 잔잔했다, 묘비도 사실대로 기록해야”
 

지난 2월 22일은 1974년 충렬사 참배를 마친 해군 159기 훈련병 330여 명을 태운 해군YTL이 통영 앞바다에서 갑작스레 침몰하며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 45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난히 봄날처럼 따뜻했던 올해 이날 망일봉 위령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통영해군전우회가 주관하고, 통영의 주요 인사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석하고, 희생된 장병들의 동기들이 슬퍼하고,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자리였다. 예년처럼 올해도 푸른 하늘을 가르며 발사된 조총소리가 숲속에 울렸고, 애국가는 무겁게 연주됐으며, 뿌연 분향연기와 함께 묵념은 올려졌다.

정량동 이순신공원 깊숙한 가장자리 숲가에 2007년 통영해상YTL순직장병 위령탑이 건립된 뒤 줄곧 이곳에서 위령제가 이어졌지만, 이제는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천안함 폭침사건과 세월호 침몰사고를 뒤섞어놓은 것 같은 YTL침몰사고 희생 장병들의 가치가 2010년 장병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사독재와 권위적인 정부 아래에서 숨죽이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유가족과 전우들로서는 45년 전 가족과 동기의 죽음이 더욱 억울하고, 한 맺힐 뿐이다.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야 할 이유는 넘친다. 우선 희생 장병 유가족들이 해가 갈수록 위령제 참석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의 나이를 30대 후반으로만 잡아도, 지금은 80대 초중반이다. 이미 세상을 떴거나, 생존했다고 해도 거동하기 힘든 연령이다. 당시 20대 초반이었을 동기생들의 나이도 이젠 70을 바라보고 있다. 길어야 10년이면 이들의 발길조차 끊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군159기 동기회 안영호 회장은 “희생 장병들의 부모는 대부분 사망했고, 형제들도 위령식에 오지 않을 정도의 고령”이라며 “우리마저 세상을 떠나면 누가 동기들을 위로해 줄까 걱정”이라고 말한다.

45년 전 희생 장병들이 YTL에 승선했던 곳, 나머지 병력이 2차 승선을 기다리던 곳, 당시나 지금이나 추모비도 없는 강구안에 동기들과 유족들이 하나둘씩 모이며 시작한 조촐한 노제(路祭)가 해군의 자금지원과 통영시의 부지제공으로 2007년 건립한 위령탑 위령제로 규모는 커졌지만 앞으로는 알 수가 없다. 유족·동기들이 없는 행사를 통영해군전우회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나라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 나서야 하는 이유다.

국가행사로 해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진실왜곡을 막고,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진정 유가족과 동기생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영호 동기회장은 “명예회복만 되면 좋겠다”면서도 “이젠 나이도 많이 들었고 추진력도 없다”며 자포자기의 심정을 밝혔다. 명예회복이란 위령탑 묘비명에 새겨진 엉터리 사고경위가 바로 잡는 것이다.

묘비명에는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침몰’이라고 돼있고, 매년 추모사와 위령제 보도자료에도 그렇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한 생존자는 “날씨 흐리고 보슬비가 내렸지만 바람은 잔잔한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생존자는 “파도 높이가 5~60cm정도였다”고 말했다. 통영의 2월 날씨는 그렇게 거칠지 않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지역민은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진실왜곡은 YTL을 수송정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실상 YTL은 예인선이다. Yard Tug Little의 약자로, 크기에 따라 YTM(Middle)도 있고, YTB(Big)도 있었다. 묘비명에는 YTL-30으로 돼 있으므로, 30톤급 예인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조그만 예인선 승선정원이 150명이라는 말도 믿을 수 없지만, 믿는다고 해도 당시 무려 330여 명을 태웠다. 결국 그렇게 많이 태우고 모선인 LST-815 북한함으로 돌아가는 바다 위에서 급변침하며 전복됐다. 하지만 수송정이 아닌 예인정에 태운 이유, 전복으로 이어진 급선회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코 자연재해에 따른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YTL정장의 운전미숙과 갑작스런 변침에 의한 인재(人災)였으며, 한낮에 통영항 안에서 벌어졌음에도 인명구조에 태만했던 바람에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의 인명손실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정확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원혼을 달래는 길이다.

해군은 ‘우리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고이자 수치’라는 어리석고 편협하며 빗나간 조직사랑을 멈추고 ‘전우의 죽음을 제대로 기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명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전사를 하던, 순직을 하던 전우들의 고귀한 죽음 위에 오늘의 명예가 있음’을 해군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해군본부 관계자는 “법규상 추모행사는 5년 동안만 각 군이 주관하고 이후에는 유가족이나 민간에 맡긴다”면서 “(그럼에도) 이양 이후 헌화, 분향, 군악대 및 의장대 지원, 감사장 수여 등 많은 지원을 계속해 왔다”고 밝혔다.

통영 앞바다는 427년 전 충무공을 필두로 수군들의 고귀한 희생이 새겨진 바다다. 왜란 평정 후 300여 년 동안 조선수군이 해상군사퍼레이드를 펼치며 왜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최전방이었다. 69년 전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성동격서의 함포사격을 했던 승전해(勝戰海)다. 비록 159기생 159명의 죽음은 억울했으나, 선조들의 영령이 얼마든지 거두어 줄 것이 분명하다. 단, 해군이 그 죽음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자랑스러워 할 때 말이다.

 

1974년 사고 당시 신문보도내용

<침몰사고에 숨겨진 다섯 가지 슬픈 이야기>

1. 해군 159기라서 159명이 희생?

해군YTL정 침몰사고의 가장 미스테리한 부분은 희생자 숫자다. 해군 159기 훈령장병들에게 발생한 이 비극의 희생자 숫자는 우연히도 159명이었다. 이 우연의 일치는 아직도 자주 회자될 정도다. 하지만 159명이 전부 해군 159기 훈련생은 아니었다. 당시 해군훈련소 159기는 해경 11기 신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증언에 의하면 해군훈련생은 6개 중대에 600명이 있었고, 해경은 각 중대에 10명씩 있었다.

충렬사 참배를 마친 뒤 강구안에 집결한 전체병력을 330명씩 2개 그룹으로 나눠서 한 대의 YTL정에 승선해 통영 앞바다 멀리 정박하고 있던 모함으로 돌아가던 중에 사고를 만났다. 첫 배에 탔던 330명은 운명의 사고를 만났고, 이중 해군훈련생 103명, 해군 기간병 6명, 해경 11기 50명 등 모두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착장에 대기하던 또다른 330명은 무사했지만, 동기생의 죽음을 평생 지고가야 할 비운에 빠졌다.

2. 왜 수송정 아닌 YTL로 병력을 옮겼나?

큰 선박은 함(艦) 또는 선(船)이라고 하고, 작은 선박은 정(艇)이라고 한다. YTL은 예인정이다. ‘L’ 역시 작다는 의미다. 예인정은 바지선이나 선박을 끌거나 미는 데 사용하며, 특히 정박에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항력이나 복원력이 크고, 조종 성능이 더 좋은 것이 일반적이다. 병력이나 군수품의 이동은 수송정, 수송선, 수송함을 이용해야 하는데, 1974년 훈련생들을 수송하는 데 사용된 것은 YTL 예인정이었다.

일부 자료에는 YTL의 승선정원이 150명이라고 돼 있지만, 예인정의 기능상 그만큼 많이 승선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1974년 당시에는 수송정이 아닌 예인정을 사용했고, 그것도 정원을 두 배나 초과했던 것은 아직도 이해불가한 일이다. 이후로도 많이 듣게 되는 사고불감증으로 생각할 수밖에.

3. 우수 훈련생들을 기다린 가혹한 운명

해군 159기 훈련생들은 1중대부터 6중대까지 편성돼, 총 12주의 신병훈련을 받았다. 8주차 훈련과정이 충렬사 참배와 함상훈련이었는데, 참배 후 모선인 LST-815함으로 귀환할 때 운명이 갈렸다. 예정대로라면 1~3중대원 300명이 먼저 YTL에 승선해야 했지만, 7주차까지 훈련우수 중대인 ‘충무중대’ 4중대가 1, 2중대와 함께 먼저 승선했다. 강구안에는 3·5·6중대가 대기했고, 3중대원들은 4중대원들과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희생자도 4중대에서 가장 많았다. 중대원 100명 중 7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훈련소 성적이 가장 좋았던 중대원들에게 너무도 가슴 아픈 교체였다. 소수만이 남은 4중대 병력은 다른 중대로 재배치됐다. 한 4중대 출신의 생존자는 “300명이 승선하는 구축함에 배치 받았다”며 “보통 동기가 20명씩은 되는데, 우리는 6명뿐이어서 더 고생했다”고 말했다.

4. 하필 부모님과의 훈련소 면회 전날에

사고일인 1974년 2월 22일은 금요일이었다. 1월부터 시작한 훈련 7주차의 주말 토요일에는 꿈에도 그리던 가족과의 면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충렬사 참배를 마친 훈련생들은 부대 복귀 후 하룻밤만 지나면 부모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고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교통도 불편하고 통신도 어렵던 당시 군대 보낸 귀한 자식 얼굴 한 번 보겠다며 전국 각지에서 온갖 맛난 것 싸가지고 이고지고, 천리 길 마다않으며 버스 타고 걷고 걸어 하루 전날 진해에 도착해 인근 여관에 투숙한 터였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비보였다. 개별적인 자식의 생사를 알 길이 없던 그들은 하루 만에 면회객에서 유가족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5. 2월에 YTL사고, 8월에 영부인 피살

당시는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유가족들은 억울한 운명을 어디에 하소연 할 데가 없었다. 유신헌법으로 종신독재를 선언한 박정희 대통령도 사고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듯했다. 사고 직후 해군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경질하고 진해 해군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훈련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하지만 진실규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다승선, 급선회 등 규명에는 소홀한 채 국립묘지 안장과 약간의 군사원호 지급 조건으로 유가족을 회유하며 서둘러 사태를 봉합했다.

8월에는 국민들의 이목을 돌리는 대형사건이 터졌다. 이해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격에 피살된 것이다. 이후 YTL 희생 장병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관심 기울이는 국민은 사라지고 말았다. 구속됐던 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은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났고, 중대장·소대장·교관·조교 등은 복직 후 만기 전역했다. 결국 159명의 억울한 죽음만이 남았을 뿐이다. <끝>

 

해군 159기 훈련장병들의 모습<사진/인터넷 캡쳐>

<YTL침몰사고 이후 변한 것들>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큰 인명손실사건으로 기록돼 있다는 YTL정 통영해상 침몰사고 발생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해군 훈련병 양성과정에서 충렬사 참배는 폐지됐고, 다만 부사관 후보생과 장교 양성과정에만 있다. 참배를 위한 이동 시에도 함정이 아닌 부대버스로 이동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훈련생들이 전투화를 신고 함정에 승선했는데, 이것이 희생자가 많았던 원인의 하나로 지목됐다. 실제 생존자들도 바다에 뛰어든 뒤 ‘재빨리 전투화를 벗고서야 헤엄쳐서 살아났다’는 증언을 했다. 물에 빠지면 목이 길고 무거운 전투화는 수영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우리나라 해군은 함정에서의 전투화 착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엄격히 금지하게 됐다. 최근에는 일정단축과 육상시설 이용으로 훈련생이 승함하는 과정도 없어졌기 때문에, 전투복에 전투화 차림으로 훈련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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