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동의 자랑
이순신 사당의 적통(嫡統), 통영충렬사

1864년, 지방의 유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전국의 서원을 국가에 귀속시켜라!”
흥선대원군이 무너진 왕권을 바로세우기 위해 지방 권력의 중심지였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와 함께 서원이 관리하던 사당도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 서원만 남을 만큼 서슬 퍼런 숙청이 감행될 때, 사당 정리에는 ‘1위인 1사당’의 원칙이 적용됐다.
당시 이순신 사당은 통영뿐 아니라 여수, 아산, 남해, 정읍 등 전국에 21곳이나 있었다.
그러니‘1위인 1사당’이란 가장 중요한 사당이 어디인가를 견주는 잣대이기도 했다.
그때 ‘이순신’의 제사를 모시도록 남은 사당이 바로 통영충렬사다. 흥선대원군이 왕의 이름으로 “이순신 사당의 종가는 통영충렬사”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통영충렬사가 왕명으로 건립된 유일한 사당이라는 의의가 작용했다.
사당은 대부분 유생들이 먼저 “우리가 이런 분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시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하는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러나 통영충렬사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기면서 “이순신 장군의 충절과 위훈을 기리도록 하라.”는 어명을 받아 건립됐다.
이후 충렬사는 조선의 해군본부였던 통제영의 부속사당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춘추제향을 봉행해 왔다. 일제강점기 중의 6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통제영 300년 역사 동안은 물론이요 6.25 등의 근대사 격변기에도 제례를 쉰 적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는다며 삼천리 곳곳에 말뚝을 박거나 민족정신이 숨쉬는 유적지를 훼파했다.
그런데 충렬사는 그 모진 기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양가감정이 오늘까지 충렬사를 보존하게 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으로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만한 원수가 없는데도, 그의 전공과 능력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사의 위대한 장군’ 앞에서 승전을 기원한 것일까? 실제로 일본의 군신, 동양의 넬슨이라고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일전쟁에 출정하면서 통영충렬사에서 일본식 제례를 지내기도 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해 세계를 발칵 뒤집은 도고 제독은 드러내놓고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그렇다고 일제가 이순신 장군의 충렬사를 고이 받든 건 아니다.
제향을 지내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고 “관리가 방만하다.”며 자기들이 평의원회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집결을 훼방하기도 했다.
한때는 충렬사 문에 그려진 태극무늬가 일장기로 변한 오욕의 시간도 있었다.
충렬사의 춘추제향을 낮에 지내게 된 것도 일본의 훼방 때문이었다.
밤 11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철썩같이 믿던 당시 사람들은 일본의 감시와 훼방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낮 11시에 제례를 지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의 제례는 실제적인 영령의 현신을 믿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전통과 예법의 전승, 행사적인 의미가 더 강해졌기에, 이제는 아무도 밤 제례를 막지 않지만 낮에 춘추향사를 거행하고 있다.

 

충렬사 외삼문 비석군

충렬사의 외삼문 좌우에는 여러 비석군이 있다.
임진왜란 후 백사 이항복 선생이 이 충무공을 기리는 글을 지은 충렬사비를 비롯해 류형, 이운룡 장군의 사적비와 이 충무공의 후손 덕수 이씨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던 분들의 사적비도 있다.
5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류형​(柳珩) 장군은 해남현감으로 이 충무공이 이끄는 수군의 핵심무장으로 활동했으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함께 했었다.
이운룡(李雲龍) 장군은 7대 삼도수군통제사로, 1592년 7년 조일전쟁 당시 경상우수영 소속 옥포만호로 참전하여 수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와해된 이후 육군으로 전공을 세운 무장이다.

 

충렬사 박덕진 이사장을 만나다

 

“충렬사는 관광지가 아니라 사당입니다”
해마다 춘추향사,탄신제,기신제 올려

“충렬사에서는 일년에 5번 제사를 지냅니다.
제례홀기에 맞춰 이순신 장군의 제례를 정성껏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통영충렬사 박덕진 이사장의 말이다.
박 이사장은 2012년에 선출되어 4년 임기를 마치고 재임됐다.
춘추향사와 4월의 탄신제,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 착량묘에서 지내는 기신제, 한산대첩 승전일을 기념하는 8월 14일의 고유제가 충렬사의 5대 제례다.
옛날처럼 헌관들이 목욕재계하고 하루 전에 입실하지는 못하지만, 헌관들에게 1주일 전 망권(임명장)을 보내 근신하게 하고 최대한 경건하게 제례에 임하도록 한다.
원래 충렬사는 통제영에서 직접 관리해 왔다. 통제영이 폐영된 뒤에는 지역 유림들이 그 자리를 지켰고,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평의원회’를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1951년에 재단법인이 설립되어, 해군, 교육청, 지자체 등이 조금씩 역할을 감당하며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박덕진 이사장은 “충렬사는 이순신의 호국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게 하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학생들을 데려와 이순신의 정신을 심으려 애쓰는 선생님을 볼 때 아주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충렬사 계단에 새긴 백석의 사랑

충렬사 앞 계단에는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작은 일화도 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18살의 통영아가씨 란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은 란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나 통영을 찾아왔지만 못 만났다 한다.
부질없이 낮술을 하고 충렬사 계단에 앉아 쓴 시가 바로 ‘통영 2’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는커녕 경부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서울에서 조선일보 편집기자를 하던 백석이 통영을 찾아오는 길은 쉬웠을까?
어렵게 동료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 백석은 란을 보는 순간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고.
란을 보고 허망하게 돌아온 백석은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렸다.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오리라.”는 말만 남긴 채.
해방된 뒤 고향인 평안도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분단을 맞았다. 북한이 고향이었기에, 백석은 남쪽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어느 문학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연금과 집필 금지 등의 수난을 겪다가 북한 문인 인명록에서조차 이름이 삭제되었다고 전해진다.
1963년 쉰한 살의 나이로 숨졌다는 소식도 일본을 통해 알려졌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