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성지, 명정동
조선 후기 명정동은 성지와 같았다.
‘이순신의 사당 충렬사’의 위상은 삼도수군통제영과 함께 통영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남았다.
충렬사 앞으로는 사체나 상여의 진입이 금지되었다. 더구나 충렬사 앞 두 개의 우물인 일정(日丼)과 월정(月丼)은 연중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었는데, 사체가 그리로 지나가면 물이 흐려졌다 한다.
명정동의 어원도 이 일정(日丼)과 월정(月丼)의 ‘일월(日月)’을 합쳐 명정(明丼)이라고 이른 말에서 생겨났다.
이 명정샘물은 예부터 충렬사에서 이충무공의 향사 때 사용하는 신성한 우물이라 하여 ‘정당새미’라 불렀다.
두 우물 아래 빨래터가 있어 동네 아낙들이 모여 빨래를 했지만, 백성들은 향사에 쓰는 ‘일정’은 건드리지도 않고 옆에 있는 ‘월정’의 물만 사용했다.
그뿐인가? 명정에서 조금 내려온 곳의 언덕에 ‘뚝지먼당’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원래 이곳은 둑기(纛旗)를 보관했던 곳이다. 둑기는 수군이 출정할 때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다. 삼지창에 붉거나 검은 깃털을 달아놓아 마치 사람 머리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 눈에는 섬뜩해 보이지만 전쟁터에서 둑기는 군영의 원수(元帥)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제영시대에는 군영에서 ‘뚝장군’이라 부르며 섬기기도 했다.
수군에서는 이 둑기(뚝장군)를 수호신처럼 여겨 ‘뚝사’라는 사당을 짓고, 봄가을 경칩과 상강일에 군영과 백성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둑제(纛祭)를 드렸다.
통영 발음 ‘뚝지’는 이 ‘둑제’에서 나왔다.
‘먼당’이 산마루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이니, 뚝지먼당은 둑제를 드리던 산마루라는 뜻이다.
그러니 충렬사와 정당새미, 뚝지먼당으로 이르는 길은 통영의 성지라 불릴 만했다.

성지의 몰락, 99 계단의 슬픔
924년, 일제는 용화사 밑에 용화수원지를 만들고, 이를 끌어와 시내로 보내기 위한 배수지를 이곳 뚝지먼당에 지었다.
1933년 완공된 이 문화배수지는 통영시에 최초로 건설된 배수지로서, 지금도 꽤 많은 3450(m²/일)의 배수량을 낸다.
문화배수지는 근대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자료로 간주되어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하지만 통영 사람들은 일제가 통영의 정기를 꺾으려고 충렬사 바로 앞에 배수지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출입구 상부에 붙은 ‘천록영창(天祿永昌)’이란 화강석 현판은 ‘하늘로부터 받는 복록이 길이 창대하고 영원하리라’는 뜻으로, 일본 천왕이 백성을 위해 물을 공급해 준다는 취지가 선명하다.
2004년 통영의 한 시민단체가 이 현판 글을 시멘트로 메꿔버리기도 했고, 한때 근대문화유산 등록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뚝지먼당의 몰락은 한국전쟁 이후에 두드러졌다. 뚝지먼당으로 오르는 99계단에 하나둘씩 사창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계단마다 연결된 게딱지처럼 작은 판자집에는 허름한 색시집이 생기고, 이곳은 통영의 집창촌으로 유명해졌다.
이 집창촌은 통영 경기의 부흥과 함께 번성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스럽게 없어지기 시작해 2003년 무렵에는 한 집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2000년대는 명정동을 비롯한 구도심이 해체되는 기간이었다. 1990년대 중반 북신만이 매립되어 무전동 신시가지가 생기자 도시의 중심은 무전동으로 옮겨졌다.
이후 죽림만이 매립된 2000년대 후반에는 죽림으로 중심지가 옮겨갔다.
명정동은 오래전 쇠락한 영광과 부끄러운 현대사의 기억 속에 통영의 빈민촌으로 21세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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