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이 곳은 바다위 다리와 뱃길, 해저터널의 3가지 통행길이 있는 특별한 곳이다.

•••근대 이후 도천동•••
섬과 육지를 잇다

“식민지 백성이 감히 조상의 원혼을 밟게 둘 수 없다.”
동양 최초로 생긴 해저터널인 통영해저터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조상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었던 송장나루 위로 다리를 둘 수 없다며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저터널이 있는 당동 앞 해협은 ‘송장나루’라 불렸다.

일명 ‘송장나리끝’, ‘송장낭끝’, ‘송장끝’ 등으로 불린 이곳 나루터에는 예부터 갈바람(서풍)이 심하게 부는 겨울철이면 송장(시체)이 자주 떠밀려 왔다고 한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는 한산도대첩에서 참패한 일본수군의 시체가 통영앞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해류를 따라 떠다니다 이 좁은 해협에 쌓였다. 켜켜이 쌓여 오도가도 못 하게 된 일본수군의 시체는 해류에 따라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해협에 끼여 있었다.

집집마다 조상의 혼과 수많은 귀신을 섬기는 일본인들은 송장나루에 서려 있는 조상의 원혼을 식민지 백성이 밟지 못하도록 다리를 없애고 해저터널을 팠다······.

그러나 이런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표면적인 명분을 그런 식으로 둘러댄 데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원래 이곳은 미륵도와 본토 사이에는 터널로 연결되기 전 썰물 때는 걸어서 오갈 수 있는 좁은 수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에 걸쳐 흙으로 메워 육지에 붙였다가, 다시 파서 수로를 만드는 일이 반복됐다.

수로를 만들 때는 다리를 놓아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착량(鑿梁), 굴량(掘梁), 판데, 폰데로 불렸다. 착량이나 굴량은 ‘파서 수로를 만든다’는 뜻이고, 우리말로 쉽게 ‘판데’라고 한 것이다.

1907년 김삼주 씨가 사비를 들여 놓은 착량교.
이 자리에 해저터널을 만들고 위로는 충무교를 놓았다. 

해저터널을 만들 당시 통영의 미륵도는 약 2만 명이 거주했던 우리나라의 황금어장이었다. 각종 어획물과 물자가 집산돼 육지와의 왕래가 1일 평균 약 3천 명에 달했다.

더구나 도남동 끝쪽에는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인 강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일본은 이 좁은 해협을 터 큰 배도 왕래할 수 있는 통영운하를 개통(1927)했고, 아래로 터널을 만들어 육로로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자국의 간몬터널(1936~1944) 시공을 앞두고 실험삼아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바다 양쪽을 막고 그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로 만드는 1년 4개월 동안, 부역에 차출된 통영민의 설움은 어땠을까? 공사기간 동안 여럿이 다치고 죽었지만, 그것은 그냥 구전되어올 뿐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이 터널은 자동차와 수레가 다니는 길이었지만 1967년 착량교 자리에 충무교가 개통되면서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통영읍장(統營邑長)인 야마구찌 아끼라(山口精)가 썼다는 ‘龍門達陽(용문달양)’이라는 글자는 아직도 해저터널 입구에서 “용궁으로 들어가 태양에 이르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통영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932년 11월 20일, 1년 4개월 만에 준공했다.

통영군청이었던 시립박물관

근대와 현대를 잇는 시립박물관(옛 통영군청사)

일제 말기, 통영의 중심지는 도천동으로 옮겨왔다.

처음 통영이 군으로 편제되었던 1912년, 통영군청은 통제영 관내에 있던 중영청이었다. 이후 항남동 매립지에 군청사를 두었다가, 도천동 지금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군청을 완공해 1943년에 이전했다.

통영군청은 충무시·통영군이 통영시로 통합되기 직전인 1994년 12월말까지 군청사로 쓰였다.

당시 통영군은 거제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 1953년 거제군이 분리되었고, 1955년에는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통영군청으로 남았다.

1995년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된 후에는 2002년까지 통영시청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2005년에는 등록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어,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채 윤이상 페스티벌하우스로 문화와 예술 활동의 전당으로 활용되었다.

2013년 9월에는 통영시립박물관으로 개관,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영에서 출토된 유물과 통영의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다.

윤이상기념관은 2017년 11월 3일에 자기 이름을 찾았다.

동양과 서양을 이은 음악가 윤이상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동양과 서양의 음악을 이은 음악가로 현대음악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통영의 뜨거운 감자였다.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이 되어 평생을 이념갈등 속에서 살다가 이국땅에서 타계한 이력 탓이다.

독일 유학 시절인 1963년, 윤이상은 강서고분을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되었고, 윤이상은 1967년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국제예술계의 도움으로 1969년에 사면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윤이상을 추방하고 다시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윤이상은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망명자가 되었다.

1917년에 태어나 남과 북이 나뉘지 않은 나라에서 살았던 윤이상에게 북한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 싶은’ 고향 통영은 남쪽에 있었지만, 남쪽의 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설립하며 적극적으로 윤이상을 끌어들였다. 윤이상은 1984년부터 북한음악계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강의하며 악기연주기법을 지도하고 유럽의 고전 · 현대음악의 악보 및 CD 등을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다.

동양과 서양의 음악을 이은 그는 갈라져 있는 남과 북도 연결하려 했던 것일까? 남쪽에서는 이적행위로밖에 볼 수 없는 북한과의 여러 공조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윤이상 선생

고향에서 추방당한 망명자는 남쪽을 대신해 갈 수 있는 곳이 북쪽뿐이었다. 하나였던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북한은 적대국이 아니라 고향을 대신할 또 하나의 조국이었는지 모른다. 추방당한 뒤의 이적행위는 어쩌면 슬픈 우리 역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운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을 이어온 이념의 벽은 높디높았다.

1995년 11월 3일, 윤이상 선생이 베를린에서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통영에 빈소를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은 빈소에 조문하는 발걸음을 무겁고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눈치를 보느라 조문을 꺼렸다.

2010년 3월, 통영시는 도천동 선생의 생가터 부근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세웠다. 하지만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사용할 수 없어, 좌와 우의 그 중간 어디쯤 ‘도천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후에도 윤이상과 관련한 사업을 벌일 때마다 보수단체는 피켓을 들고 찾아와 “빨갱이는 물러가라!”를 외쳤다.

이 건물이 제이름을 찾은 건 2017년에 들어와서다. 정권이 바뀌고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통영시의회가 만장일치로 ‘윤이상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되찾기로 했던 것이다.

2017년 11월, 통영시는 선생의 추모제를 기념하여 기념관 앞에 표지석을 제막하고 윤이상기념관을 재개관했다. 선생이 독일에서 쓰던 가재도구도 가져와 선생이 살던 집을 축소한 베를린 하우스도 만들었다. 

윤이상의 이름을 찾은 날, 문재인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동서양의 음악을 융화한 윤이상은 악보 위의 선은 자유롭게 넘나들었지만 한반도를 가른 분단의 선만큼은 끝내 넘지 못했다."며 선생을 추모했다.

지금 윤이상기념관은 해안을 매립하여, 육지 쪽으로 한참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어린시절 살았던 집은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였다. 문만 열면 보이는 바다, 조그맣게 찰싹거리는 파도소리 같은 것들이 소년 윤이상의 마음에 각인돼, 그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음악을 만들었다.

지난해 3월, "고향의 바다소리를 듣고 싶다."는 윤이상 선생의 뜻에 따라 통영시는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의 유해를 가져와 국제음악당 한켠에 안장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 싶은' 통영 바다 곁에 누워서, 지금 윤이상 선생은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까? 

윤이상이 탄생한 도천동 거리는 벤치 하나도 음악적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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